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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믹 테일러 시기 2020. 11. 22. 19:39

    스톤즈 전기 번역

     

    이거...시기상 넬코트 이전이에요...유럽 투어 보충글 ...^^

     

     

    1. [ 키스의 보디가드 겸 마약 조달자로서 일주일에 250달러의 숙식을 더하고 샤이엔 워크에서 살고 있던 토니 산체스는 중독이 어떻게 키스와 아니타를 파괴하는지를 보았다. 모든 약쟁이들처럼, 약값을 지불하고 있던 키스도 자신의 은신처를 숨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섹스에 큰 관심은 없다고 했던 리처즈는 아니타와 몇 달 동안 떡을 치지 않았고, 토니는 그들이 싸우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어린 시절의 고립에서 탈출한 이후부터 키스는 믹, 브라이언 또는 아니타와 함께 작업했다. 이제 헤로인은 그의 협력자가 되었다. 키스와 아니타는 친한 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아니타의 무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토니, 마약과 함께 샤이엔 워크에서 지냈다. 

     

    뉴욕의 전문가인 조셉 그로스 박사에 따르면, 락스타들과 다른 창조적인 예술가들이 약물 중독과 싸우는 것을 돕는 것은 약물이 짧은 시간 동안 창의력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비록 키스는  헤로인이 그의 작품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리처즈의 마약 사용은 윌리엄 S. 버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실제 창작 작업에 아마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1970년과 1971년은 키스가 중독과 함께 작곡가로서는 그의 전성기가 될 것이다.]

     

     

    2.  [앨런 클라인의 손에서 스톤즈를 빼앗는 것은 믹에게 떨어졌다. 빅터 보크리스는 "재거는 통제권을 장악해야 했다"고 말했다. "만약 믹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누가 했을까?" 루퍼트 왕자의 지원을 받은 재거는 스톤즈의 변호사들에게 클라인이 그룹으로부터 돈을 빼돌려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고 비난하면서, 클라인을 상대로 2900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하라고 명령했다. 클라인은 1970년까지 제작된 모든 작품에 대해 스톤즈의 저작권, 출판권, 마스터테이프를 관리했다. 2009년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재산은 그러한 권리를 계속 통제할 것이다. 한편 루퍼트 왕자는 재거에게 스톤즈를 클라인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200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 그 때문에 원래 계약 조건에 따라 하나의 최종 앨범을 요구하고 있던 데카와는 대립하게 되었다.

     

    재거는 데카사가 스톤즈의 노래와 앨범 커버를 검열하려 하는 모습이 싫었고 데카 사의 회장의 무례한 태도에 개인적으로 기분이 상했다. 일종의 작별 선물로, 재거는 “Cocksucker Blues.라는 새 넘버를 가지고 루이스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가사 미쳤으니까 꼭 들어보세요 ㅋㅋㅋㅋㅋ)

     

    1970년 여름, 스톤즈는 다시 투어를 떠났다. 이번에는 6주 동안 지속된 14개 도시 유럽 투어를 했다. 가는 곳마다 믹은 친절하게 마샤에게 편지를 썼는데, 마샤는 이제 임신 5개월이다. (..^^) 

     

    투어 자체에 관한 한, 스톤즈가 알타몬트의 여파로 폭력을 선동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었다. 그들의 지옥 같은 날은 끝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여러 도시마다 스톤즈는 팬들이 거리로 나와 차를 뒤집고 불을 지르고 상점 창문을 부수면서 여전히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지금쯤 대륙 전역의 사법 당국은 스톤즈를 불가피하게 촉발시킨 난장판과 같은 작은 침략군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때쯤에 비앙카 만남 자세한 건 믹비앙카 결혼글 참고하세용)

     

    1970년 11월 3일 믹은 비앙카에게 마샤 헌트가 그날 아이를 낳았다고 말했다. 믹은 아이의 이름을 '미드나잇 드림'으로 지으려고 했으나 현명한 헌트가 '카리스'로 지어줬다.  비앙카는 이제 믹의 다음 아이의 어머니로 결정되었지만, 그가  아버지 타입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후 2주 동안 그는 갓난 딸을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약속 시간 사이에 몇 분 동안만 잠깐 들르고 갔다. 헌트는 믹의 그들 아기에 대한 명백한 무관심에 믹에게 화를 냈다.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라고 믹이 그녀에게 소리쳤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구나!" 

    헌트가 절망했지만, 그것 때문에 믹은 더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영향력을 휘두르는 데 있어서 그녀는 그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녀는 내 아이"라고 말했다. "내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당신에게서 그 아이를 빼앗을 수 있어." "한번 해 봐." 헌트가 말했다. "그럼 당신 머리를 날려버리겠어."

     

    스톤즈가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은 라이브 앨범 ‘Get Yer Ya-Ya’s Out!,’ 의 성공에 크게 힘입어 뉴스위크는 믹을 표지에 올려놓으며 "믹 재거는 그의 지속적인 화려함, 본능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악마적인 힘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놀라운 존재다."라는 평을 했다.  

     

    재거는 재정을 관리 하는 일 말고도 그 이상을 했다. 믹은 끊임없이 회의를 열었다. 믹에 대한 거부권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가 어떤 일을 시행하기 전에." 그들의 오랜 사업 동료인 샌디 리버슨이 말 했다. "믹은 키스에게 얘기 한다. 키스가 싫다고 하면 믹은 좆된 것이다." ] 

     

     

    3. [로웬스타인은 분명히 클라인보다 두 가지 뛰어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능숙한 재무 관리자란점과 둘은 양심적으로 정직하다는 것.  그는 스톤즈를 위해 변호사와 회계사들로 구성된 국제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그들의 돈과 그들 모두를 보호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키스 리처즈는 모든 나라의 경찰을 지속적으로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970년에서 1990년 사이에 파산의 가장자리에서 약 5천만 파운드의 순자산으로 옮겨갈 것이다.

     

    Sticky Fingers 세션에서 밴드는 "Keith Richards time"에 살아야 했다. "그는 자신만의 감정적인 리듬 패턴으로 작업했다."  키스가 뭔가를 설명하기 위해 멈추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녹음 엔지니어 앤디 존스가 말했다.  "키스가 리프 작업을 3시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코를 파는 동안 그렇게 했을 것이다."

     

    1970년 여름  Sticky Fingers 작곡은 리처즈의 커리어에 전환점이 됐다.  Sticky Fingers에 수록 된  ‘Brown Sugar’ 와 ‘I Got The Blues’ 를 제외하고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톤즈 노래를 모두 직접 작곡 했다. 1990년에 편찬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스톤즈 10대 곡 목록에는  ‘Jumpin’ Jack Flash’, ‘Street Fighting Man’, ‘Satisfaction’, ‘Honky Tonk Women’, ‘Gimme Shelter’, ‘Sympathy For The Devil’, ‘Midnight Rambler’, ‘Brown Sugar’, ‘Ruby Tuesday’, ‘I Got The Blues’. 등이 있다.

    (아니 키스....새티스팩션 처음 작곡 했을 때는 맘에 안 든다고 지랄..^^ 했으면서 하하)


    마약때문에 세션에 자주 불참했던 브라이언에게 분노 했던 키스도 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 했다. 스톤즈가  ‘Moonlight Mile’ (재거와 믹 테일러가 작곡) 을 녹음할 무렵, 키스는 너무 약에 취해 있어서 제대로 참여하지 못 했다. 키스는 세션 작업에 도움을 줄 뮤지션들을 데려오기 시작 했다. 그가 데려온 뮤지션들의 영향력과 연주에 의해 밴드 내에서의 키스의 지위는 힘을 얻었다.  그램 파슨스는  ‘Wild Horses’, ‘Country Honk’, ‘Dead Flowers’, ‘Far Away Eyes’ ‘Sweet Virginia’에주요 
    공헌을 했다. 파슨스와 다음 20년 동안 키스와 함께 작업 할 다른 많은 사람들은 존스의 복제품이었다. 

     

    두 번째 등장인물은 27세의 텍사스 색소폰 연주자 바비키스로 키스와 같은 날, 같은 해에 태어났다. 리처즈는 "많은 사람들이 69년 믹 테일러만 밴드에 합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라고 지적했다. 땅딸막하고 창백한 얼굴의 바비키스는 리처즈의 마약 사이드킥이 되었고  ‘Brown Sugar’ 같은 수많은 스톤즈 노래에서 연주하는 키스의 기타를 훌륭하게 보완했다. 스톤즈에서 바비키스의 등장은 재거가 늘 수상쩍어 했지만 리처즈의 리더십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믹 테일러, 그와 키스가 연주자로서 상호 존경을 받았음에도 밴드의 누구와도 유대감을 갖지 않았던 믹 테일러는 자신을 격리 시켰다. 

     

     재거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특히 키스가 그램과 ‘Wild Horses’ 를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관계를 질투 했다. 믹은 그램이 키스에게 아첨을 많이 하는 것을 관찰했고 파슨스가 그저 그들의 유명세에 묻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을 뿐이라고 믿으며 그램의 동기를 의심했다.  "믹은 매우 소유욕이 강하다" 키스가 말했다. "그의 태도는 '넌 그를 가질 수 없어' 라는 것이었다." 

     

    아니타 팔렌버그: 믹은 늘 키스의 삶에 있는 사람에 대해 불평할 것이다. 그는 항상 키스의 친구들을 모두 불평했다.

    하지만 믹은 키스가 작곡의 근원이 필요한 사람이란 걸 깨닫지 못 했다. 그램이 키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확실하다. 키스는 영감을 얻기 위해 비발디와 클래식 음악을 듣곤 했고 그램은 분명 영감의 원천이었다.

     

    글리머 트윈즈는 유닛으로 활동 했다. 믹 테일러에 따르면, 그들은 계속해서 밴드 내에서 창조적인 힘을 발휘했고 스톤즈를 위해 모든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1970년 9월부터 10월까지 스톤즈는 바비 키스, 호른 연주자인 짐 프라이스, 키보드인 니키 홉킨스와 함께 유럽을 투어했다. 그들의 팬들에게는 스톤즈가 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그들은 특히 키스의 새로운 모습을 좋아했다.  아니타에게서 빌려온 여성용 패션인 고급스러운 스팽글 블라우스를 입고 현상의 모든 사토리얼(남성용 의류) 상징을 경멸하는 냄새를 풍기는 모습. 어깨길이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 늑대같은 두개골과 병적인 얼굴은 노스페라투(뱀파이어 영화)의 느낌과 그의 반쯤 감은 눈이 강조돼보였다. 

     

    일단 음악이 시작되자 열기는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폭동,방화,체포ㅡ예측불허의 일ㅡ 모든 쇼에 동반됐다. 조명을 조작한 존 던바는 "그들은 완전히 흥분을 했다," 라고 회상했다. "그들이 믹을 보고 외쳤다.  믹! 믹! 남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 그것은 빌어먹을 성스러운 처녀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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