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믹텔 시기글 3 (알타몬트 사건 1)
    믹 테일러 시기 2020. 11. 10. 14:13

     

    스톤즈 전기 번역

     

    1. [ 여기 헬스 엔젤스의 핵심 인사인 소니 바거가 오신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며. 그는 그의 오토바이를 "스위트 코카인"이라고 불렀다. 1968년, 어떤 바보가 소니의 오토바이를 훔치는 실수를 범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다. "아무도, 내 말은, 내가 "스위트 코카인"을 되찾을때까지 이 동네에서 아무도 오토바이를 타서는 안돼." 

     

    "우리는 원인이 되는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여 그들을 묶고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바거가 자서전에 썼다. 30분 정도 지났을 때, 현관문이 열리고 다른 공범이 거실로 던져졌다. 우리가 마지막 남자를 찾았을 처벌이 시작되었다 (고문하는 과정이 잔인해서 생략...^^ 이런 걸 왜 자서전에 쓰는거지..) 그들 중 한 명이 우리에게 '왜 그냥 우리를 죽이고 끝내지 않는거야?' 라고 소리를 질렀다. ”

     

    바거는 믹과 키스, 존과 폴, 마리안느, 아니타를 형성한 것과 같은 목적 없는 전쟁후 병폐의 산물인 50년대에 자랐다. 

    과분한 자유, 억압된 자유, 너무 많은 위험, 너무 많지 않은 위험, 전쟁은 없고 당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다.

     

    고등학교 때, 그는 존 레논의 리버풀의 테디 보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저(194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북미의 중~하류 계층이나 젊은층 사이에서 유행하던 서브컬처이자 패션 트랜드)였다.  그의 아버지는 센트럴 밸리의  99번 고속도로의 포장관리 일을 했다. 소니의 어머니는 가족을 버렸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는 진짜 집을 가진 적이 없다. 이것은 그의 분노와 위기를 설명해준다.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체격이라는 사실이 그 점을 강조했다. 

     

    소니는 암호를 가지고 있다: "녀석들이 나와 싸우고 싶지 않다면, 나를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의 친구가 되고 싶다. 내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면, 내 눈에 띄지 마. 나한테 말도 걸지 마.  내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은데 내 면전에 들이닥치면 내가 그를 해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날 해칠테니까.”

     

    소니는 패거리를 만들었다. 1954년 오클랜드 가죽 재킷을 입은 비행청소년들, 뒷면엔 “Earth Angels.”라는 이름이 꿰메져있다. 열여섯 살 때 소니는 나이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신병 훈련을 거쳐 호놀룰루로 보내졌고  미군 수송부의 오토바이와 사랑에 빠졌다. 어느 틈엔가 그의 실제 나이가 들통났다. 열일곱 살 때,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더 자랐고, 강인해졌다. 크고 하얀 이빨로 조롱한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옷은 불량해졌다. 그는 권총을 보여주기 위해 외투의 소매를 뜯었다. 그는 바닷가재처럼 만들어졌다: 거대한 발톱과 수수한 껍질. 새벽녘, 퇴근길, 1번 고속도로에서 북쪽으로 달리는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급 승용차와 역마차가 매 밑에 비둘기처럼 흩어져 있다.

     

    54년 소니 바거는 말론 브란도와 리 마빈이 출연한 스탠리 크레이머의 영화 "위험한 질주"를 보러 갔다.  

     

    (위험한 질주는 최초의 오토바이 폭주족 영화, 최초로 오토바이 폭력배를 조사한 영화라네요..^^ 알탕 범죄 느와르물) 

     

    그것은 바거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리 마빈은 영웅이 되었다. 바거는 클럽을 찾으러 갔다. 초기 오토바이 갱단은 전쟁 후 캘리포니아에서 "수천 명의 참전 용사들이 전쟁 전 패턴으로 돌아가는 아이디어를 단호히 거부한"것으로 형성되었다. 

    1950년대 중반, 소니가 그들을 찾으러 갔을 때, 대부분의 참전용사들은 고비를 넘겼고, 다시 민간인 생활로 동화되었다.

     

    (소니 바거가 19세가 되던 1957년에 해골 옆으로 날개가 돋아 있는 선명한 로고를 박고 다니는 오토바이족 갱단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함. 그 로고는 돈 리브스라는 오토바이족이 새크라멘토에서 가져온 것임.  자기네 로고에 영감을 얻은 바거의 패거리는 스스로를 헬스 엔젤스라고 부름. ) 

     

    헬스 엔젤스에서의 삶은 가장 위험한 종류의 재미였다. 그것은 싸움, 파티, 그리고 “runs”으로 구성돼있었다. 수 천명의 폭주족들이 고속도로를 점령하고, 주류 상점에서 캠핑장으로 이동하면서 미리 정해진 장소로 이동하는, 진정한 방탕한 삶이 시작되는 도시나 공원이나 집들.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위계질서가 있었다.

     

     

    <헬스 엔젤스의 규칙들>

    1. 클럽의 술에 마약을 타지 않는다.

    2. (오토바이로) 달릴 때 모닥불에 탄약을 던져선 안 된다.

    3. 다른 멤버의 아내를 건드려선 안 된다.

    4. 미팅 중에 마약 사용 금지.

     

     

    그들 나름대로 헬스 엔젤스들은 락스타처럼 살았고, 메인데 없이 자유로웠며, 부르주아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그들이 엉망이기를 좋아했는지! 50년대 후반, 그것은 벤제드린과 레드였는데, 키스와 브라이언이 첫 투어에서 게걸스럽게 복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마약이었다. 

     

    헌터 톰슨 (미국 저널리스트)60년대 초에 엔젤스와 함께 하기 시작했는데, 이 협회는 비트의 시인들과 잼 밴드와 무법자들을 섞은 바이커/히피연합을 이끌었다.  스탈린/히틀러 조약처럼, 그것은 지속될 수 없었다. 1965년 10월 16일, 바거와 그의 일행들이 반전 시위대 떼를 두들겨 패면서 그것은 무너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법자 폭주족들은 그들을 상징으로 만드는 배우들과 음악가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헌터 톰슨조차도 경멸을 받게 되었다. 바거는 "헌터는 진짜 나약한 사람이었고  겁쟁이였다" 라고 썼다. "그는 권총을 들고 집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인터뷰하러 나타나는 작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창문 밖으로 총을 쏘는 방법에 대해 읽는다. 그는 잘난 체하고 가지는 않는다. 그가 우리에게 강경하게 행동하려고 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헌터 톰슨은 겁을 먹었다. 나는 켄터키 출신의 키가 크고 말랐으며 전형적인 촌뜨기인 그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가짜였다."]

     

     

    2. [ 공연장이 자꾸 바뀌면 안 좋은 징조다. 스톤즈는 골든 게이트 파크에서 무료 콘서트를 열 예정이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효과적으로 되지 않았다."  협상에 관여했던 스톤즈 로드 매니저인 로니 슈나이더가 내게 말했다.  "큰 거래는 그런 것이다. 와해 될 수도 있다." 

     

    (알타몬트에서 공연 하기로 함)

     

    로니 슈나이더는 처음부터 무료 콘서트에 반대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는 "전제부터 전부 헛소리였다"고 설명했다. 

    "이 공연은 음악 평론가 랄프 글리슨이 스톤즈가 팬들을 이용해서 티켓값에 바가지를 씌운다고 말한 데서 시작 됐다. 스톤즈는 그 말에 대해 끔찍하게 느꼈다. 멤버들은 내가 '이봐, 그가 잘못 알고 있어! 그건 사실이 아니야!' 라고 말 하는 것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야기에 말려들었다."

     

    "랄프 글리슨이 프로모터인 빌 그레이엄과 함께 요금 이야기를 했다." 샘 커틀러가 말 했다. "그들은 티켓 가격을 놓고 스톤즈를 비난해 왔었다. 더 도어즈는 미국에서 최고가 티켓에 7달러를 청구했고, 스톤즈는 8달러 50센트를 청구했다. 글리슨은 그것에 대해 칼럼을 썼다. 그리고 나서 또 다른 글에서 스톤즈가 근본적으로 흑인 음악을 연주했다고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글리슨은  스톤즈가 흑인 음악가들에게 로열티를 지불할 것을 제안했다. 좆같이 멍청한 놈. 내 말은, 스톤즈가 흑인 음악의 가장 큰 지지자였잖아. (스톤즈 음악은 흑인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어용. 당시 보수적인 영국 음악계가 흑인 음악을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터부시했는데 스톤즈는 그런 흑인 음악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는평가를 받습니당.) 그것은 스톤즈를 비판하는 너무나 얄팍한 방법이었다. 멤버들은 예민해졌고 히피들은 모두 스톤즈에게 무료 콘서트를 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알타몬트가 마침내 무료 콘서트 장소로 정착되었을 때, 커틀러는 준비할 시간이 며칠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커틀러는 안전에 대한 문제로 눈을 돌렸다. 보안 요원들은 처음부터 스톤즈 콘서트에 참석해왔고, 때때로 너무 관여해서 쇼의 일부처럼 보였다.  초창기 푸티지에서 당신은 종종 보안 요원이 팬들로부터 밴드를 보호하고, 무대에 오르려는 소녀들을 막고, 스톤즈가 연주할 공간을 확보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군가 알타몬트에서 경찰을 고용하자고 제안했지만 1969년 경찰은 미움을 샀다.

     

    찰리 와츠는 "시카고 폭동이 최근 발생했다"면서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장면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경찰이 보안을 맡으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

    경찰이 아니라면 누가 스톤즈를 보호할것인가?

    어느 날, 샘 커틀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마린에 있는 믹키 하트의 목장으로 차를 몰고 가서, 그곳에서 트램프 테리라는 이름의 헬스 엔젤스를 만났다. 그레이트풀 데드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히피와 폭주족 사이의 통로 역할을 했던 하트는 커틀러에게 엔젤스를 쇼에 초대하라고 말했다. ㅡ그들을 데려와 맥주를 줘.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거야.

     

    (샘 커틀러는 스톤즈는 헬스 엔젤스 고용할 생각 없었고 그냥 쇼에 초대한 걸 지들이 오해한거다 어쩌구 웅앵하던데 hmmmm) 

     

    소니 바거는 그 협정을 다르게 이해했다. 바거에 따르면, 에밋 그로건이라는 샌프란시스코의 "힙스터"는 알타몬트에서 보안 업무를 위해 엔젤스를 고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가로 엔젤스는 500달러어치의 맥주를 받게 될 것이다. 

     

    "엔젤스와 맥주 500달러의 도시전설과 싸우기 위해 노력했다." 로니 슈나이더가 내게 말했다. "그런 일은 없었으나 모두가 그랬다고 하니 차라리 그랬을지도 모르지. 나중에, 밴드가 [전국 TV 쇼]에 출연할 때, 그들은 '론, 우리가 뭘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난 '그래, 부탁이야, 제발, 헬스 엔젤스에게 5백 달러를 지불했다는 그 바보 같은 이야기를 죽여줘' 라고 말했다. ”]

     

     

    3. [ 알타몬트로 들어가는 길은 순식간에 압도 됐다. VW 버스와 자동차들이 언덕을 드나들었다. 바람도 불고 계절에 맞지 않게 추웠다. 태양은 대지의 입술에 앉아 있다가 희미해졌다. 어둠.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지난 10년 동안 나타났다. 재거와 리처즈는 현장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들은 공연 전야에 신처럼 내려왔다. 그들은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사람들이 캠프, 텐트, 모닥불을 피우는 언덕을 가로질러 걸었다.  스톤즈의 로드 매니저인 로니 슈나이더는 저널리스트 스탠리 부스처럼 그들과 함께 있었다.

     

    군중 속에서 나온 한 소녀가 재거의 팔을 만지며 "너 진짜야?"라고 물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환상적인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들어서자 베르날 디아즈 델 카스티요는 옆에 있던 전사에게 고개를 돌려 "이게 꿈인가?"라고 물었다. 당신이 의심하는 것은 도시의 존재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존재다.

     

    "어느 순간, 우리가 캠프파이어 옆에 서 있을 때, 한 남자가 우리에게 큰 포도주 항아리를 건네주었고, , 우리는 술을 마셨다."   로니 슈나이더가 내게 말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대마를 주었다. 다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기 믹과 키스가 있었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마를 피우고 몇 분 동안 불 주위에 서 있다가 무대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가 걷고 있을 때, 나는 돌아서서 보았다. 우리를 따라온 사람은 40여 명이었다. 그냥 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우리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키스는 '여긴 아름다워. 난 남아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

    그는 모닥불 사이를 돌아다니며 소작농들과 술을 마시고 하늘을 읽으며 밤을 보냈다. ]

     

     

    4. [ 아침이 되자 기쁨으로 가득했던 분위기가 불길하게 변해 있었다. 푸른 하늘이 검게 들끓었다. 

     

    "새벽에 알타몬트를 보자마자 내 직감으로는 일이 어렵게 풀릴 것을 알았다." 커틀러는 나중에 말했다. "엄청나게 추웠다. 술에 취해 돌팔매질을 한 사람들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다가와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날이 될 거라고 말한 다음 아편 덩어리를 내게 주었다. 거기서부터 어렵게 풀렸다."

     

     동생 데이빗과 함께 영화 김미셸터에서 알타몬트를 연대기화시켰던 앨버트 메이즐스가 처음으로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아침. 그것은 단지 군중들의 에너지였다.   밴드가 연주를 시작하기 몇 시간 전, 나는 단지 그것을 감지하기 위해 군중 속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나한테 와서 말했다.  '이 자리에서 당장 비키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어' 물론 거기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웃긴 것은, 살인이 일어난 정확한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

     

     

    나중에 이어서 글 올릴게요..

    '믹 테일러 시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믹텔 시기 5  (0) 2020.11.17
    믹텔 시기글 4 (알타몬트 사건 2)  (0) 2020.11.11
    믹텔 시기 글 2  (0) 2020.10.22
    믹 테일러 시기 글 1  (0) 2020.09.29
    스톤즈의 프랑스 망명기  (0) 2020.07.06

    댓글

Designed by Tistory.